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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의 감각

하늘의 끝은 어디일까? 하늘의 끝 다음에는 또 무엇의 시작일까 하는 의문이 시작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 후 학교만 꼬박 27년을 다녔는데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 사춘기에 가졌던 철학적 명제 가운데 가장 절실했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창조주를 알게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면서 명쾌해졌다. 하지만 화창한 젊음 가운데 생각해보던 죽음은 아직 추상이었다. 몇 년 사이로 정말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삶의 구성원으로 생생하게 듣고 보아온 이들을 결별하게 하는 죽음은 어떤 질의 답변과도 상관없이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볼 때의 현기증과 함께 속절없는 상실감을 동반하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바람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사라지는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켜낼 수 없다. 전날 통화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 주검으로 발견되는 현실은 어지럼증을 동반한다.신학적으로나 임상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은 또 부서진 인간 관계, 삶의 애환과 질병, 영적인 공격을 받는 상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죽음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이간이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성경에서 죽음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모든 과일을 마음대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을 때다. 두번째로 죽음이 언급된 것은 사탄의 입을 통해서다. 뱀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다. 이것이 사탄이 인간에게 한 가장 치명적이고 또 최초로 한 거짓말이다. 사탄의 최우선적인 공격 대상이 하나님이며 그 다음이 인간을 속이는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바로 생명을 파괴시키고 죽이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인간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탄의 말을 들음으로써 죽음이 현실이 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긍휼과 자비로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이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을 깨끗하게 청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본래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두번째 아담으로 예수를 인간 세상에 파견했다. 그 분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부활과 영생을 증거시켰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째는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인 성정에 따라 살고,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다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다. 죽으면 끝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들도 흔히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해도, 죽음은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 허무와 절망, 그리고 의욕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는 배경이 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믿는 마음 상태라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또 다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고 영원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라면 그런 사람들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천명한다. 믿음은 설명할 수 없어도 믿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화잍헤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세속을 초월한 지속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분이 창조한 이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때가 올 것이다. 비록 죽음으로 인한 지독한 상실감 때문에 현기증과 구토, 애간장이 오그라드는 슬픔을 감당할지라도 재회의 소망이 있으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하늘의 끝은 아직 헤아릴수 없어도 그것을 만든 이를 믿을 수 있다면 감사하지 않겠는가.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 창조주 하나님 아담인 예수 상실감 때문

2022-01-28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각과 말이 가 닿는 곳

새해가 시작되면 신년특별기도회나 금식기도회 등의 소식을 흔히 듣게 된다. 기도는 사람들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성경전반에 걸쳐서 발견하게 되는 내용은 하나님은 단지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신다는 것이다. 민수기 14장에서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구절은 가나안 땅을 염탐하고 돌아온 열두명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갑론을박으로 시끄럽던 장면에서 나온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에 들어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머지 열명은 적들이 거인들임에 반해 자기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반대했다. 대다수의 보고를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놓아 울면서 모세와 아론에게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불평하고 대들었다. 그들이 또 하나님께 반역하지 말자고 설득하는 여호수아와 갤럽을 돌로 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셨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두 역병으로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간청을 드렸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청대로 그들을 용서했지만, 하나님 귀에 들린대로 하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이 말했던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될 것이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못박으신 내용이다.     예수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이나 이방인들처럼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셨다. 위선자들은 바리새인을 가리키며,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장 잘 지키고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열심히 기도하던 이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유창하고 우아한 기도를 내용이 없이 허망하다고 하셨고, 이방인들은 기도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인 줄 알고 중언부언한다고 지적하셨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마음을 보신다(사무엘 상16:7)”는 구절은 성경전반에서 확인된다. 그 예로 창세기 21장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자 아브라함이 슬퍼했다고 나온다. 이어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스마엘을 돌보아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광야로 내쳐져서 마침내 물과 양식이 떨어진 하갈은 아들이 굶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멀리 떨어져 앉은 채 소리 죽여 울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녀의 아들이 우는 것을 들으셨다고 전하면서 이스마엘이 큰 나라를 이루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주시고, 하갈의 눈을 열어 물이 있는 우물을 보게 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게 불평이든 대화든 한숨이든 기도든 간에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 속에 가진 생각을 다 듣고 계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하나님, 연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심이 큰 위로를 주지만 한편으론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물결이 가 닿는 기슭처럼 우리의 마음에 깃든 생각과 우리의 말이 가 닿는 곳이 하나님의 눈과 귀라고 일깨워준다. 교회 밖에서의 삶과 교회 내에서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한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코메디가 될 것이다. 예배나 기도에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우리 격언을 “생각은 하나님이 보시고, 말은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 기억해 둘만하다. 말조심을 하라는 격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각과 말을 둘 다 조심하라는 경고문으로 기억하면 좋을 일이다. 우리의 혀에 재갈을 물리고 생각하면서 말하되, 우리 마음 속 생각까지 보는 이를 염두에 두고 순수한 마음, 정결한 생각으로 지켜가며 살아가기를 작정해야 하겠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각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 연민 하나님 보시기

2022-01-14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부동의 평강을 위하여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상공회의소가 마련한 조찬 미팅에서 서부의 모자를 하나 선물 받았다. 사진 기자들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도록 케네디에게 써보라고 권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그 다음 월요일에 백악관으로 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그 날 오후 달라스에서 암살당했기에 다시는 백악관에 돌아가지 못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살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고 곳에 대하여서는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가 있을 때 혼동이나 방황이 적은 행로가 될 것이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모른 채 살아가면서도 흔연하게 내일을, 한 해를 그리고 먼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날을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습관을 만드는 동물로 정의될 만큼, 예상이 가능한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불청객이나 기대치 않은 일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상에 불쑥 끼어드는 일이나 놀라게 되는 일은 설사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어도 계획에 차질을 빚고, 일상을 흔드는 것이라면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삶에 무언가가 끼어들어 기존의 상황을 흔드는 일이 없이 도약적인 발전이나 참신한 방향 전환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의 위대한 일들은 급작스런 변화와 개입으로 일어났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 창조의 부분으로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심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여러 부분에 걸쳐 급작스런 변화나 생경한 일들에 대해 예비하도록 권면한다. 영적으로 깨어있다는 의미는 예기치 못한 일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삶에 찿아드는 불청객이나 예기치 못한 사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며 삶의 흐름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당면한 상황을 수용할 줄 아는 융통성은 자기가 세운 목표나 심지어는 각자의 개성까지도 포기하고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하고, 또 겸손이라고 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 때론 고통에 대해 어떤 대답을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다른 관점을 찿고, 궁극적으로 숨겨진 의미나 축복의 실마리를 구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 히브리서에 나와있다. 결코는 확실한 약속이며 하나님을 찿는 이를 위해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나이만 고려해도 많은 이들의 삶은 이미 승패가 나있고 남은 생이 뻔하다. 그러나 피조물의 세계를 넘어 창조주의 세계와 그 약속을 그리고 기대하는 삶이라면 일상의 사건 때문에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예견하지 못하나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부동의 평강을 새해의 계획표 아래 받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위한 기도”는 흔들림 없는 평강을 위한 대표적인 기도문이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시련쯤으로 받아들이게 하옵고,// 죄로 물든 세상을 내 원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땅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저 세상에서는 다함이 없는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옵소서.” 위로부터의 평강이 임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종려나무 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부동 평강 케네디 대통령 에프 케네디 계획표 아래

2022-01-07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해질녘 시간대의 매혹

이야기가 살아있는 곳은 명소가 된다. 여러 사람들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찿아가는 곳. 그런 곳에서 만나지는 이들은 왜 그곳에 있는지 서로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함께 공유한 내용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장소가 명소가 되는 이유는 비록 허구일지라도 함께 공감하는 낭만과 감상이 있어서이다. 동시대인들에게서 느끼는 연대감, 친밀감, 그리고 연민은 서로 공유한다고 믿어지는 문화, 시대의 사건 등을 삶의 배경으로 나누어 가진 탓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신뢰감 또한 비슷한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책을 선물로 주고 받는 것은 비록 파편적으로나마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가는 노력일 수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낯선 사람이 한눈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심코 돌아보는 시선이나 우수 어린 자태, 어딘가를 바라보고 서있는 무아지경의 옆모습 등, 한 순간의 모습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을 대할 때에도 그런 순간은 종종 찿아 온다. 나무가 서있는 오르막 등성이를 보며 걷노라면 고개 넘어 익숙한 마을 풍경이 연상될 때가 있다. 시공을 초월한 기억과 상상의 혼재 현상이지만 여전히 정답고 평화로운 느낌으로 실제가 된다.     햇살 넘치던 하루가 기울어가는 오후가 되면 급히 방문해야 할 곳이 있는 듯 서두르는 마음으로 차의 시동을 걸곤 한다. 해질녘 두어 시간대의 매혹은 그 어떤 표현도 설명도 불가하다: 추억하는 모든 감상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시간,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들었던 내장산 여행길의 저녁나절 풍경처럼 여행지에 있는 듯한 시간, 시제를 드리고 소 달구지를 타고 돌아가던 길에 보았던 과수원 사과나무 사이로 번지던 불타던 하늘, 영상으로 담고 싶어지는 시간, 공중에 나는 새떼를 좇아가고 싶은 시간, 해 그림자가 일렁이는 처마에서 그리움을 읽어내는 시간, 마음을 내어주고 햇살을 들이고 싶은 시간, 기억의 배경에 가라앉아 있던 이야기들이 활동사진처럼 살아나오는 해질 무렵은 바야흐로 마음의 방랑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어둠이 물처럼 밀려들어 황금빛 햇살을 점점 위로 떠밀어가다가, 키 큰 나무가지의 꼭대기에만 남겨둔 풍경을 좇아 서향으로 천천히 차를 몰곤 한다. 일리노이 하이웨이 웨스트 90을 타고 가다가 20번 국도로 가는 길은 정 서향으로 난 길이다. 그 길을 타고 석양에 갈레나에 닿도록 출발한다면 평원에 내리는 석양을 만끽할 수 있다. 20번 국도에서 락포드 공항으로 인도하는 2 S로 빠지면 Rock River 를 따라 딕슨 쪽으로 주욱 이어져 강변 드라이브코스로 명명해도 좋을 멋진 길을 만난다.     이민생활에서 드라이브는 자가치료제다. 동무가 없어도 혼자서 외롭지 않게, 때론 당면한 삶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도록 기억나는 과거와 상상되는 미래의 온갖 미학의 세력을 다 소환해내는 감성의 도구로 드라이브 쎄라피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 걸음이 힘겨워진다면 이미 해 저문 인생길일 것이다. 노년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외로운 행로다. 그러나 모든 것의 마지막은 항상 정점의 이면임을 생각한다.   석양이 구차하지 않고 슬프도록 아름답듯이. 물질은 크게 세가지 성향으로 나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불에 가까이 대면 타들어가는 가연성 물질, 불에 대도 타지 않는 불연성 물질, 그리고 스스로도 잘 타는 자연성 물질이다. 사람에게도 이 세가지 성향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주변의 영향을 받으면 행동하는 인간 유형, 좀처럼 함께 타지 않고 다른 사람이 가진 불씨마저 꺼뜨려버리는 불연성 인간 유형, 그리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는 자연성 인간 유형이다. 자신에게 친숙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는 자연성 인간이 언젠가 한번은 본듯한 가연성 인간을 만나면 소통이 되어,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나이에 무관하게 스스로 타고, 또 함께 탈수 있는 성정으로 해 저무는 한해를, 그리고 인생을 완성해 가기를. 정녕 해질녘 시간대의 매혹으로 물드는 삶이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해질녘 시간대 시간 마음 시간 기억 시간 시제

2021-12-30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를 다스리는 대안에 대하여

이미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사진이나 영상은 하나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19세기 초에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가 처음으로 사진을 발명한 후 50년쯤 지난 1880년대에 그 유명한 코닥 회사가 세워졌다. 사진을 처음 접하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상상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있다는 복음 역시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기적 이상의 내용이다.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세상을 보는 관점 즉 마음보다. 기독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본성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입으로 시인할 때 갖게 되는 영성의 두 가지 본성을 갖는다. 일상생활을 할때 육신은 죄성과 약함을 포함하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려 하고,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본성,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신성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본성은 자신에게 집착한다. 자기본위의 사람은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 없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할뿐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적대시한다.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며 성경은 그것을 부패한 본성이라고 지목하고 본성에 따른 육적인 삶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의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경험하는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고, 영혼의 괴멸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이 그들에게 가르친 많은 거짓된 내용을 삶의 정석이나 진리로 알고 살아간다. 남을 따라 살면서 어떤 인생이 잘사는 인생이라는 식의 획일적 선전 즉 거짓에 기반한 판단과 생각 때문에 불행하고 불만족스럽고 혼동된 채 살아간다. 그 거짓의 내용은 이 세상에 속한 영광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더 많이 소유하고자 욕망한다. 불행하게도 욕망은 끝이 없다. 참 기독교인의 삶은 그래서 마음 속에 영적인 전쟁터를 둔 삶이다.     신약성경 27권중 무려 13권을 쓴 바울사도조차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하지 않는 생각을 차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대치할 수는 있다.     신학자인 닐 앤더슨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남겼다: “오래된 불손한 생각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바꾸려고 노력하거나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중단시킬 수는 없다. 분명하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는 일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사람이 거짓의 아비, (사탄)를 극복하는 것은 진리를 선택할 때뿐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의 영은 죽을 몸과는 달리 살아있게 되고, 영에 의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수 있는 세가지 단계로, “내게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으며 삶을 축하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할 때 의미가 있다. 그것이 교회와 일상이 조화되는 신앙생활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유지한 채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 신앙여정이며, 모든 크고 작은 결정은 마음속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치열한 갈등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때만 건전하고 깨어있는 신앙이 된다.     19세기인들과는 달리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간 사람들의 모습과 목소리와 영상을 생시처럼 생생히 다시볼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하는 현대인들처럼, 기독교인은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선물이며 은혜다. 아이큐에 상관없이 은혜를 사모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마음보 대안 예수 그리스도 종려나무교회 목사 생각 때문

2021-12-17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삶이 어려워지면 신앙인들은 흔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반문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질병이나 실직, 실패의 고통 가운데 있게 될 때나 불의를 경험할 때, 또 무종교의 사람들이 윤택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을 볼 때도 막연한 회의에 빠진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삶 가운데서 겪는 고난이나 고통, 실의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신실한 신앙생활이 부와 권력, 명예나 건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꿈꾸는 집이나 이상적인 배우자나 바람직한 자녀나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어떤 행로로 이어지는 인생길이건 설사 폭풍 속을 헤치고 가는 길이라 해도 함께 동행하시다가 다음 세상에 갈 때 있을 곳을 마련해주신다는 내용이다. 다음세상에서 홈리스 될 일은 없다는 한가지 보장 뿐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음에도 왜 어떤 연유로 대다수의 교인들 그리고 교인을 판단하는 세상 사람들은 근거 없는 오해 가운데서 수시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타박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아직 그의 어머니의 태내에 착상되기 전부터 그를 알았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하시면서 예레미야에게 평생의 사명을 주셨다.     성경에 나타난 예레미야의 삶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살해 위협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던 사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스스로 죽기를 자청할만큼 험한 역경 속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성공적인 사역이나 평탄한 앞날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와 함께 해주신다는 내용 한가지였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뿐이다.     예레미야의 예가 증명하듯이 신앙인은 사기가 저하될 때 함께 해주시고 고난을 이기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인생에서 만나는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시켜 주시는 분이 아님도 분명하게 기억할 일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이 땅에서의 안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예는 수없이 많다.     쌍동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봐도, 선택 받지 못한 에서는 인생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안락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던 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챈 행적 태문에 야반도주를 하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야곱의 인생은 두려움과 외로움의 순간들을 견뎌내고 수많은 해를 낯선 땅에서 머슴처럼 일하며 살아낸 행로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세상적인 개념인 개인의 행복과 성공의 가치관을 기준한 게 아니고, 궁극적인 영혼의 처소 및 몇 세대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을 지닌다. 예레미야는 비록 하나님을 의심하고, 마음이 상하고, 갈등해야 했지만 “주님이 환난날에 나의 힘이요 요새요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하며 신실함을 지켰다.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고 끝내 소유하는 집요함을 보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삶 가운데 계신 것을 고백하는 생을 살았다.     밤이슬을 맞으며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한 야곱은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두려워하며 그 자리를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전이라고 명했다. 이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일용할 양식과 입을 옷을 주고,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주신 축복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예수는 요한복음1장에서 야곱이 본 환상과 같은 내용을 언급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이 본 사다리 대신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는 인자라는 단어로 바꾸고 사람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사다리의 역할을 하시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르치셨다.   믿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수용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 대신, 하나님의 존재를 구하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직 멤버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클럽이다”고 했다. 근거 없는 오해일 랑 떨쳐내고 더 늦기 전에 예수 클럽에 가입하기를 권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예수클럽 여호와 하나님 반면 하나님 예수 클럽

2021-12-10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자기소개서

직장을 구하기 위한 이력서나 학회 논문을 제출할 때 간단한 신상명세서를 첨부한다. 십여년 전에 처음으로 책을 출간할 때, 세련되고 조금은 신비스럽게, 그리고 독자의 궁금증을 유도하게끔 노출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지역 감정이나 편견을 초래하는 양식에 출생년도까지 포함시키는 극히 촌스럽고 적나라한 방법의 작가 소개서를 첨부했다. 한 때의 객기는 아니었다. 어디서나 환영 받는 초대강사, 채플린, 심리상담학자 등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편안하게 시작할 수도 있던 초빙 목회도 굳이 사양한 채, 개척교회를 결단했을 때도 객기가 아니었다. 사람의 말로 축하해주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험난하고 구차스러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고 그것은 현실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교회문에 첫발을 들인 늦깎이 신앙이었으나 뜨겁게 하나님을 만난 경험 가운데서 깨우쳐지는 하나님의 구원 경영은 정착된 교회 문화와는 별개의 내용인 것이 희안했고, 나아가 새로운 교회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바뀌었다. 일반대 출신인 탓에 선후배 간의 연결고리나 기도해주는 군단도 없는 사십대 후반의 여자 목사가 품은 비현실적인 포부였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마음에 품는 생각만으로 이미 이룬 것과 같은 크레딧을 주시는 것을 믿었다. 십여년 넘게 상담사역을 하면서 목격했던 동포가정의 실상은 이중문화와 세대차이, 언어의 장벽이 뒤죽박죽으로 섞이어 오해와 불통의 상태에 살면서도 그 이유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견뎌내는 혼돈이었다. 결핍된 공감대를 제공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는 그 자체만으로 멋진 꿈이었다. 굳이 두세배의 어려움을 감당한 채 이중언어 교회로 개척한 이유다.     신앙은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여서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교회에서의 행동과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행동이 다르다면 위선이다. 예수가 단호하고 가차없이 비판한 유일한 대상이 위선자였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가르친 것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다. 교회가 위선을 가르치는 장소가 되어있다. 아닌가? 그렇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몇몇 대형교회의 행태 때문에 기독교를 싸잡아 비난하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천국의 비밀이 드러나는 영적 전쟁터가 교회라는 것을 안다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사분의 삼은 이미 가짜거나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좋은 토양에 대한 예화로 천국의 비밀에 대해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네 가지 토양에 떨어졌고, 그 중의 한 토양만 좋은 토질이어서 씨가 발아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나머지 세 토양에 떨어진 씨앗은 열매 없이 사라졌다. 즉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공부해도 그 중 25%의 사람들만 말씀을 이해하고, 들은 내용대로 산다는 의미다. 나머지 70%가 넘는 예배자, 혹은 교인들이 뿌리 없는 식물처럼 잠시 존재하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무관하게 사라진다.     여기서 더 두려운 내용은 가라지의 비유다. 좋은 씨가 뿌려진 그 자리에 사탄이 계획적으로 가라지 씨를 뿌렸고, 그 가라지가 곡식과 같이 자란다. 즉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늬만 기독교인으로서, 실은 사탄이 심어놓은 가짜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교회가 영적인 전쟁의 최전방인 이유를 예수가 이미 예견하셨다. 목회자의 책임 가운데 하나는 비방과 험담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선을 일깨우는 일이다. 좋은 씨와 악한 씨가 뿌려진 모판을 경계하고 있어서 악한 씨에 의해 좋은 씨가 해를 입는 사태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늑대의 입으로부터 양을 나꿔채내는 일은 목자의 몫이다. 궁극적으로 선하게 인도하는 절대자의 계획을 믿는 신앙은 용기를 갖게 한다. 바울 사도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듯이, 올바른 신앙생활은 사람이 만든 교회의 전통이나 문화를 맹목적이고 위선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근거한 격식과 문화를 창출해서 살아나가는 것이다.     개척교회 목사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감사 그 자체다. 동료목회자들이 붙여준 이름표도 자기소개서에 첨부한다. 이름하여 “막가파 목사.” 두려워할 게 없는 목사라는 칭찬 아닌 칭찬으로 받는다. [종려나무교회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자기소개 개척교회 목사 종려나무교회목사 ph 교회 문화

2021-12-03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할러데이 블루스

11월의 끝자락에 자리한 추수감사절과 그 후로 이어지는 성탄절 그리고 연말연시가 있는 12월은 부산한 계절이다. 감사가 오가고 만찬이 이어지는 들뜬 시절인 한편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대고독이 새삼 절감되는 스산한 계절이다. 할러데이 철이 되면 가족모임과 파티로 들썩이는 사회와는 무관하게 사별한 가족이나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적막감 속에 평소보다 더 상실감과 우울을 경험하는 상태를 할러데이 블루스(Holiday Blues)라고 한다.     수년간 병원 채플린으로 일하면서 목격한 바로는 장기 입원한 환자들이나 노환을 앓는 이들은 할러데이가 지난 직후나 1, 2월경에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비록 방문하지 않는 가족일망정 어딘가에 자녀나 친지를 둔 환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마음 상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의 기본성향 중 가장 강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갈망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미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합중국 대통령 각하라는 칭호를 선호했고 캐더린 여제는 폐하라고 쓰여있지 않은 편지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인생의 말미에 병상에 누운 사람들에게는 가족과 친지 외에 그 어디에서 인정받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가족과 친구, 정을 나누고 사는 지인들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자기가 속한 사회, 그룹, 단체 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 사업가와 흉악범의 차이는 똑같은 욕구 충족을 위해 다른 방법을 쓰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이 종교의 목적에 헌신하거나 고상한 도덕심을 내세우거나 또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추한 일면을 감추려고 애쓴다고 했다. 유튜브에는 전문성도 책임감도 없는 아마추어들의 이론과 주장, 보여주기와 가르쳐주기 영상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내용이 인간관계에 대해서나 이성의 마음을 사로 잡는 법 내지는 상대의 마음을 점쳐보는 내용들이다.     오랜 상담의 경험으로 볼 때, 결혼한 사람들과 데이트하는 사람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환상의 존재유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한 사람 사이에서 환상이 깨어지는 것은, 상대방에 대해 가진 환상이라기 보다는 상대가 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서다.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원해지지 않고 매력 있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 거듭 확인된다면 더 이상의 설레임이나 기대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연애하는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지는 때는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 이상으로 그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함께 있을 때 기쁨보다 상처, 인정보다 비하감이 더 느껴지는 관계라면 같이 하고 싶은 욕구는 사라져갈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나 실제의 자신과 자기가 원하는 자신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괴리감을 이해하고 눈감아주려고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분수를 파악시키려는 실수를 하는 것이 결혼한 커플들의 가장 큰 실책이다.     갈릴레오는 “아무도 남을 가르칠 수 없고, 다만 스스로 깨닫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고 했다. 주제 파악은 본인이 할 때는 미덕이나, 주제 파악을 시키는 것은 어리석거나 오만한 자의 실책일 뿐이어서 결국 정 떨어지는 관계가 되고 만다. 이는 부모나 배우자들이 범하는 가장 빈번한 과오여서 가족이 남보다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진정한 애정과 사랑은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대를 지금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는 이가 있는가? 장차 할러데이 블루스만큼은 피해갈 일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할러데이 블루스 할러데이 블루스 마음 상태 가족일망정 어디

2021-11-26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감사, 참감사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여행이나 수련회를 떠나는 가방 안에 감사카드를 몇 장 챙겨 넣게 했다. 감사는 느낌이 아니라 행동이며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사 없이는 행복할 수 없고 진실한 믿음을 위해서도 감사는 필수적이다. 예수는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을 받았을 때 그 답으로 열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하셨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에서 추방되던 병이었다. 문둥병자는 제사장으로부터 병이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아야만 정상생활로 복귀가 가능했으므로, 예수는 그들이 깨끗해졌다고 선포한 후 제사장에게 가서 치유된 것을 확인 받게 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가 한 말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치유되었다. ‘순종이 믿음의 시작이다’는 메시지다. 열명의 문둥병자들의 피부가 깨끗해졌다고 할 때의 그리스어는 영어의 카타르시스의 어원인 카싸리조(katharizo)로 육신적인 병이 치료된 것을 의미한다. 열명의 문둥병자들 모두 감사를 느꼈을 터지만, 막상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예수는 그 한 사람에게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는가고 물은 후에 “일어나 가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누가복음(17:19)절을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인 유진 피터슨 목사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고 너를 구원하였다”고 번역했다. 예수가 그 한 사람에게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할 때의 동사는 소조(sozo)로 영적인 질병과 죽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다. 안팎이 다 치유되지 않고도 병은 나을 수 있다.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현 시대의 대부분의 교인들의 상태를 대변한다.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육신의 병을 치유 받는 것으로 그쳤지만, 감사하기 위해 예수께 돌아왔던 한 사람의 문둥병자는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구원, 즉 영생을 약속받았다. 예수는 이 땅에서 단지 몇 년 더 살게 하는 육신의 질병치료가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온전해지도록 치유해주는 분이다. 참 감사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감사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명령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늘 행하는 사람 자신을 위해 주어진 내용이다.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감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한 사람이 되며, 감사하는 사람이 더 온전한 사람이 된다.   마틴 루터가 참 예배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열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감사를 표현하러 돌아온 그 한 명이라고 답했다. 참된 예배를 잘 표현한 한 단어는 바로 감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마치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처럼 이 세상의 삶과 오직 보이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문제를 해결 받고 나아지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이나 하나님께 감사함을 망각하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암이 치유 받고, 기적적인 문제 해결과 은혜 받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태도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목격해 왔다. 몸담았던 교회를 비방하고 불만하며 교회를 이리저리 전전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베풀고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채, 자기 맘에 드는 찬양대, 설교,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차없이 교회를 바꾼다. 감사보다는 짜증이 많고, 까탈스럽고, 무책임하다. 병명 진단을 받았대서 병이 치료되지는 않는 것처럼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인은 아니다. 감사 결여의 상태는 거듭나지 않고 혼동된 사람들의 특징이다. 죄를 탕감 받고 구원 받은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교회, 목사, 교우 등 주와 관련된 모든 내용에 경박한 말을 삼가고, 감사가 허물을 덮는 태도일 때 정상적인 신앙인이다.   감사는 일회성 감정이 아니며 참감사라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된 관계를 통해 지속될 것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감사 종려나무교회 목사 아홉명의 문둥병자들 감사 결여

2021-11-19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생사 처방전

손으로 물을 쥐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로 행복을 들 수 있다. 행복은 쉬이 잡힐듯하다가도 놓치는 아쉬움이 있어 파랑새로 비유되기도 한다. 어릴 때나 젊어서는 남들이 하는대로, 세상이 가르쳐주는대로, 사회가 당연시 여기는대로 삶을 정의하며 살아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남이 아닌 자신이 정의하는 삶과 인생, 행복과 불행의 의미에 대해 숙고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의 정의로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일들의 합계를 생각한다. 서로 서로 좋은 일, 궂은 일을 알아주고, 축하하거나 기념할 날을 기억해주고, 친절한 말과 소소한 선물을 통해 관심을 주고 받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치 있는 사람으로 들어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상태로서의 행복이다. 그런 일들은 한결같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즉 행복은 선택이다.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관계의 방향이 결정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행, 불행의 여건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날마다 매순간마다 행, 불행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그렇게 지속되다가 유한점에 다다르는 날이 온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넘어 계속되는 삶을 약속한다. 구원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는 길이다. 인생에서의 행, 불행의 선택처럼 하나님을 믿거나 거부하는 것 또한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생과 사에 대한 즉석 선택에 대한 좋은 예가 구약에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떠돈 지 38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사건이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 심한 불평을 했다. 그 불평의 대가는 사막에 나타난 불뱀에 물린 사람은 다 죽어 나가는 벌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와 고통가운 데서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과 모세에게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며 모세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신 해결책은 먼저 청동으로 만든 구리뱀을 막대에 달도록 한 후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는 말씀으로 죽음을 면하는 처방전을 내리셨다. 신약에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면서, 막대에 달린 뱀을 바라보면 살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면 산다는 답을 주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허망하기까지 한 처방전은 비웃음을 사고, 외면당하고, 괄시를 받아왔다. 뱀에 물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따위로 몸 속에 든 독이 가시겠냐고 실소하며 자신의 지식과 자존심을 내세우다가 끝내 죽어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련만, 평소에 하나님과 모세를 믿지 않고 불신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갈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막대에 달린 불뱀 사건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생사에 관한 처방전임에도 자신의 지식과 판단이 더 중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웃기는 이야기이거나 실소하며 간과할 내용 이상은 아닌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극한 죄로 정의한 인간의 교만이다. 어차피 인간의 지식으로는 죽음 저편의 내용이 가늠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쉽게 선택하고 기대해 볼 수 있는 영생의 처방전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일 것이다. 나중에는 어찌 되거나 당장 원하는대로, 몸에 붙은 습관대로 살리라는 나태한 이유에서거나, 누가 내린 처방전이든 자신이 이해하고 판단하는 내용대로 죽으면 끝이라는 나름 확실한 소신파들이다.     공짜로 천명된 처방전, 예수가 요한복음(3:14)에서 직접 하신 말씀을 보라:“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인 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원한 행복의 기회마저 저버리는 선택 또한 각자의 몫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 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처방전 생사 생사 처방전 처방전 예수 인생 행복

2021-11-12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능력에 대하여

능력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나 지식으로 정의된다. 지력, 영력, 체력, 재력 등 그 종류나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나이와 함께 차별화된 능력을 생각한다. 한 예로, 굽 높은 하이힐을 신는 것은 능력일까? 10센티미터나 되는 뾰족구두를 신고 반듯하고 당당하게 걷는 것은 분명 건강한 신체와 자존감을 보여주는 능력일 것이다. 능력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은 길거나 짧게 훈련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굴욕이나 수모를 견뎌내고 억울함이나 오해를 감당하는 것, 화를 다스리는 것, 죄책감을 직시하고 치리하는 것은 분별력 있고 판단력 있고 성숙한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자질이자 능력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지 즉 선택의 자유는 은총이지만 생각 없이 쓰거나 악을 행하는데 사용된다면 저주가 되는 위험한 내용이다.     여러 책을 출간한 저자이자 정신과의사인 엠 스캇 펙은 사람이 일련의 선택을 하는 동안에 점차 악인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명백한 이유가 없이도 자기들이 원해서 악을 선택하고 악인이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참을성의 부족이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자신의 잘못을 몰라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쾌한 감정을 참고 견뎌내는 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즉 죄책감을 감당하는 능력이 낮은 사람은 악인이 되기 쉽다.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죄책감을 들게 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증오심을 표출한다. 자기들의 처지나 잘못을 알고도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자기 때문에 손해를 입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공격을 한다.     교회에 분쟁이 많은 이유도 그런 악의 존재 때문이다. 목사를 미워하는 교인들이 한번쯤은 스스로를 꼼꼼하게 살펴보아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희랍인들, 예수를 죽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가졌던 증오심의 뿌리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은 제거하고자 하는 죄성과 악에 닿아있다.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을 최우선에 두는 것이 교만이다.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직시하는 대신에 그것을 알고 있거나 일깨워주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악이다. 따라서 교만은 악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첫번째 그리고 가장 심각한 죄성은 교만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그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나, 무능력이나, 실책 또는 나쁜 성질에서 기인된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강한 의지로 독자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도외시한 채,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이며,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화를 부른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접근할 때 썼던 전략은 그녀의 교만심을 부추기는데 있었다. 시 에스 루이스는 “세상에는 크게 오직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한 부류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부류는, “너희 뜻대로 될지어다(네 멋대로 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사람들이다고 했다.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므로, 예수조차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설득하지 않았다. 자기 주장이 강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묵살해서 그 사람의 내적 성장을 방해하고 삶의 열정을 소멸케 한다면, 그 사람은 악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악은 내적 불편함을 참아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속성이다. 불편함을 견디는 것은 능력이다. 하이힐을 신는 것 또한 불편함을 견디는 훈련이자 걸음에 실어 전하는 중력에 대한 항거의 메시지다. 하여, 하이힐을 신는 것은 분명코 능력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능력 종려나무교회 목사 희랍인들 예수 내적 불편함

2021-11-05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죽이고 살리는 요소

20세기 초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로 명성을 떨친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악화시키는 것은 태도라는 요소 하나라고 했다. 윈스턴 처칠은 태도라는 작은 요소가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모든 인간관계의 핵심요소는 태도라고 본다. 그렇다면 태도는 어떻게 형성될까? 태도는 정신적인 습관, 즉 사고방식의 결과물이다. 태도가 바꾸어지게 하려면 그 사람의 안목이 바꾸어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올바른 태도를 함양해서 지켜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보도의 공정성에 의문을 자아내면서까지 한달 반 이상을 뉴스의 초점으로 보도해왔던 20대 초반의 연인들 행적이 끝내 살해와 자살이라는 결론으로 막이 내린듯하다. 그 기간 동안에 행방이 묘연하다가 주검으로 발견된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한 두 번 뉴스에 소개되면 그만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개비 프티토와 브라이언 론드리 사건은 유명연예인 못지않은 대형 뉴스거리로 달포를 넘기는 기록을 남겼다. 4개월 예정으로 서부를 여행하면서 상세한 여정을 인터넷에 소개해오던 블러거 연인들은 한달 반 만에 둘 사이의 폭력이 목격되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카메라에 불안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실상이 적나라하게 찍혔다. 그 후 두주쯤 후에 또 다른 불화의 현장이 목격되고, 22세의 꽃다운 여성의 목숨은 그로부터 두어 주 후에 끝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장래의 며느리감과 함께 살았던 23세 아들의 부모들은 함께 떠났다가 혼자 돌아온 아들과 꼬박 2주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변호사를 기용했을 뿐, 행방불명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사돈가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화를 내고 집을 나갔고, 며칠이 지난 후에서야 아들이 행방불명 되었다고 신고를 한 부모들은 변호사를 내세워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그 후로 한 달여가 지났고 결국 공원의 늪지에서 뼈마저 훼손된 상태의 비참한 브라이언의 몰골이 발견되었다. 아직 어린 두 연인의 말로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사나운 짐승이 출몰한다는 공원의 습지로 들어가 최후를 맞은 23세 청년의 마음상태를 상상하면 살아서 겪었을 지옥이 어떠했을지 숨이 막힌다.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반달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그 부모는 무슨 생각과 태도로 아들을 대했을까 생각하면 더 이상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법망을 피해서 아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에 앞서, 어떤 내용이 되었든 잘못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도록 제대로 인도했다면 아들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하는 비극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 함께 살았던 예비 며느리와 애태우는 그녀의 부모와 가족에 대한 기본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변호사를 앞세운 침묵을 택하는 대신 아들을 먼저 설득해야 했을 것이다. 브라이언의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자신이 경험한 환경이나 세상에 대한 인식이 자유를 원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자유는 자기의 성정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데서부터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폭력적인 성향을 다스릴 수 없다면 자유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연인을 살해했거나 실수로 죽게 만드는 환경을 제공했다면 그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살수도 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자 수상이었던 조오지 맥도날드는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한번 벌어진 사건은 되돌릴 수 없지만, 그 사건에 대한 태도만큼은 선택이 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의리를 지키는 태도를 가진다면 생지옥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요소 대신 아들 기본 의리 기본 예의

2021-10-29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사색의 계절에~

찬기운이 목덜미에 서늘하게 감겨오고 엷어진 햇살이 멀건 풀대죽 빛깔로 사위어 내리는 가을 하루는 늘 아쉬움과 함께 저문다. 허공을 휘돌아 날리는 낙엽을 보는 순간이면 누구나 시인의 감성을, 예술가의 성정을, 그리고 철학자의 사색을 공감할 터이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여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 사색의 정의다. 소크라테스는 “점검되지 않은 생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인생을 점검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얼굴 없는 사람들이 말했음직한 성공의 기준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질시의 항목이기도 하다.     19세기 구한말 의사였던 이제마는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은 지혜로운 자를 미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투현 질능”에 있다고 했다. 탈무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 천사가 방문해서 그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의 이웃은 그가 성취하는 것의 두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전해주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심상에 원하는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리라. 마침내 그가 천사에게 말했다: “제 한 쪽 눈을 멀게 해주실래요?” 천사는 큰 한숨을 쉬었고, 그의 원대로 이루어졌다. 자기의 삶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웃의 인생을 먼저 헤아리고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     질시의 태도를 갖고 남을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을 더 눈여겨 본다. 울타리 안 자신의 삶을 다독이기보다는 남의 집 담장 안을 기웃거리며 남의 일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고, 자신처럼 남들도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실상보다 보여지는 허상이 더 중하고, 삶의 중심은 장대로 받쳐들린 물고기 부레처럼 허공에 둥둥 떠있기에, 나이를 먹어도 성년이 안된 사춘기 아이들처럼 안팎으로 부산한 채 무엇에도 헌신하지 않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부류의 사람들이 하는 불평은 성경에도 나온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와있는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하루 품삯을 일꾼들과 약속하고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했다. 그 후 9시, 12시, 3시, 그리고 일이 끝나기 1 시간 전에도 일꾼을 불러와서 일하게 한 후, 청지기를 시켜서 나중 온 자부터 처음 온 자 순서로 일당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모두 똑같이 하루 품삯을 받게 하였다. 일찍 일을 하기 시작했던 자들이 더 받을 줄 기대했다가 실망하여 주인을 원망하자, 주인의 응대가 이랬다: “내 것으로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후한 것을 네가 시기하느냐?” 포도원 일꾼들은 약속대로 받은 자기 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받은 후한 요금 때문에 불만했다. 재밌는 현상의 하나는, 이 성경구절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이 자신들을 하루가 다 저물 때 고용된 일꾼이 아니고 온 종일 일한 일꾼들과 일치시키고, 그들의 불평에 쉽게 공감한다는 사실이다.     포도원의 일부 일꾼들처럼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한다. 어떤이는 건강을 잃은 후에, 어떤 이들은 불편한 처지에 대해, 또 다른 이들은 가진 것이 부족하다며,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혹은 경기가 나쁘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보다 더 가지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대가 없이 누리고 산 것들이 헤아려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사색의 계절에 무엇보다도 문신처럼 새겨진 인류의 병, 질시의 지병이 진단되고 치유 받게 되기를. 남이 아닌 자신의 인생에 촛점을 맞추고, 자유하며 나아가는 여정이 되기를.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최선주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사색 계절 포도원 일꾼들 일부 일꾼들 종려나무교회 목사

2021-10-22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교회의 성전은 주님이 성령으로 자리하신 곳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하늘문이 열린 곳이다. 영적인 영역을 인정하고 영적인 전쟁에 대비하고 사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원하는 것을 자각하여 근신하고 절제하는 삶이기도 하다.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그리고 삶의 향방까지도 독자적인 판단 이전에 자기 존재와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해드린 주님이 인도하는대로 나아가기를 작정한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인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당연히 마음의 갈등이 더 민감하게 감지되고 그때마다 결단이 요구되는 신앙생활은 그럼으로 용기와 의리가 없이는 가능치 않다.     신앙 여정은 결코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이 아닌 교회내의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이어서 교회에만 출석하면 교인이 되는 현실에서 몇몇 교인들을 보고 기독교 신앙을 매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신앙인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먼저 감사하며 주께 의지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십수년 전 교회를 개척한다고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이해나 지지를 얻기도 어려웠다. 맨땅에 헤딩하는 무모한 일이며 칭찬보다는 욕을 먹고 도마 위에 올린 생선토막처럼 온갖 수모를 당할 것이다고 점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새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천사람이 만말을 하며 개척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주께서 사명을 주셨으면 그 가는 길에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기쁘고 즐겁게 나아갈 수 있는, 소명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온 나라사람들이 다 두려워하던 골리앗에 맞선 단아한 미소년 다윗이 멋진 말을 외쳤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개척사역은 아무 자원 없이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수년간 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해온 목사님의 이름을 듣고, 자청하여 그 분을 만났다. 우리 성전에서 교회를 시작하도록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조건 없는 제안에 한 가정 성도를 두고 기도하고 있던 목사님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받아들였다. 젊은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면서 주께서 종려나무교회를 기억하시고, 그 사역자인 내게 감동을 주셔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기도문을 위한 문구가 아니고 진정한 고백이어야 한다.     설립예배를 하는 축사에서 진심으로 전한 개척교회 선배로서의 확신은 다음과 같은 내 믿음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가 그 동안 꿈꾸며 기도한 사역의 내용들을 이미 성취된 것과 똑같은 기쁨으로 받으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눈으로 하는 평가는 앞으로도 아무 의미도 없음이다. 격려하기 위해 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서다. 목회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상황에서나 기대감이 생겨나고 부동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 지붕 두가족 살림이 쉬운 일만은 아닐지 모르나, “형제의 연합하고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한 시편 기자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동역자로 본이 되는 사역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종려나무교회와 새소망교회의 찬송과 기도가 함께 주의 보좌에 상달되어 주를 기쁘게 하는 두 교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www.palmtreechurch.org]     Kevin Rho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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